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문단 편집) === 예나 시기 === 그러므로 이제 헤겔은 강단 철학자로서 대학의 교수가 되는 길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1800년에는 용기를 내어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셸링]]에게 교수 임용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사이 셸링은 철학계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는데, 셸링은 무명의 가정교사에 불과했던 옛 친구 헤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헤겔은 곧장 셸링이 있는 예나로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셸링의 추천을 받아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예나 대학]]의 교수 임용 시험에 도전한 헤겔은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라는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하여 합격했다. 그리고 겨울 학기부터 임시 강사 자격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헤겔은 첫 해에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 체계의 차이』를 출간하면서 학문적으로 셸링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1년 뒤인 1802년에는 셸링과 함께 《철학 비판 저널》이라는 학술지 편집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렵 셸링은 동료 아우구스트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형이다.]의 아내 카롤리네와 연애 끝에 결혼하면서, 이를 역겹게 지켜보았던 주위 동료들에게 배척당했다. 셸링은 도망치듯이 뷔르츠부르크 대학으로 떠났고, 이렇게 됨으로써 헤겔과도 멀어졌다. 이제 홀로 서게 된 헤겔은 자신의 미래 전체를 걸고 자기 자신의 책을 써서 지식인들의 사회에 우뚝 서야 했다. 그리고 헤겔은 철학사에 길이 남을 책, 『정신현상학』을 1807년에 발표한다. 『정신현상학』은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 준 출세작이자 이후 그를 대표하는 책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기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쓰면 쓸수록 원고가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출판사에 원고를 전달하기로 한 날짜를 번번히 어길 수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가장 중요한 장을 저술하고 있을 때,[* 1806년 10월 13일.] 예나 중심가는 프랑스 군이 일으킨 전쟁으로 포격을 당하고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집 창문 밖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친구 니트하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황제가 ㅡ 그 세계 영혼이 ㅡ 도시 외곽에서 말을 타고 정찰하는 모습을 보았네."[*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301] 전쟁은 예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학의 신입생은 줄어들었고 그만큼 헤겔의 급여도 줄어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가정부 요한나 부르크하르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루드비히 피셔가 태어났다. 돈이 부족해진 헤겔은 어떤 형태의 일자리든 얻어야 했다. 헤겔은 다른 대학의 교수자리를 절실하게 찾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고,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밤베르크에 있는 신문 편집자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신문 편집자로서의 생활은 수입도 괜찮고 사회적 지위도 보장해 주었지만, 그래도 헤겔이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대학을 자신의 천성적인 고향으로 여겼다. 헤겔은 바이에른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친구 니트하머에게 대학 임용에 관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냈고, 1808년에 니트하머는 헤겔에게 뉘른베르크에 있는 김나지움[* 한국으로치면 중ㆍ고등학교에 해당한다.]의 교장직을 맡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헤겔은 비록 원하던 대학 교수 자리가 아니지만, 신문 편집자로 있는 것보다는 더 낫다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